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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미(米)’

군산신문2026-09-07 09:38:37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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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연호 (사)서수면사람들 이사장



​제2-천 년 전의 배

  

이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서수의 옛사람들은 아마 물가의 창고부터 말했을 것이다.

  

고려 현종 9, 서기로 1018년 가을이었다.

  

새벽안개가 들판을 덮어, 멀리서 보면 땅과 하늘을 가릴 수 없었다 한다. 수확을 끝낸 논에는 잘린 볏짚이 누워 있었고, 그 위로 하얀 물기가 내려앉았다.

  

그 안개 속을 사람들이 걸었다. 지게를 진 사람이 있었고, 소달구지를 끄는 사람이 있었고, 머리에 곡식 자루를 인 여자가 있었다. 가는 곳은 모두 한 곳, 강 가까이에 선 거대한 창고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진성창이라 불렀다.

  

그해 열두 살이던 연화가 아버지 무진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무진의 등에는 볏섬 하나가 얹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게가 끼익, 끼익 울었다. 연화는 한동안 그 소리를 들으며 걷다가 물었다.

  

아부지.”

  

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부지.”

  

.”

  

힘들어요?”

  

안 힘들다.”

  

연화가 볏섬을 올려다보았다.

  

거짓말.”

  

무진이 피식 웃었다.

  

니가 뭘 안다고.”

  

힘드니까 땀나잖여.”

  

사람은 걸으면 땀나는 겨.”

  

나는 안 나는데.”

  

너는 빈손이잖여.”

  

연화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빈손이었다. 잠시 후 무진이 말했다.

  

그렇게 미안하면 좀 들어라.”

  

연화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요?”

  

그려.”

  

저걸?”

  

.”

  

연화는 볏섬과 아버지를 번갈아 보더니, 냉큼 앞서 걸었다.

  

내가 생각해 봤는디, 아부지가 그냥 드는 게 낫겄어요.”

  

뒤에서 웃음이 터졌다. 끝순네였다. 남편을 일찍 잃고 어린아이 둘을 혼자 키우는 여자로, 몸집은 작았으나 목소리만큼은 마을 장정 셋을 합친 것보다 컸다고 전해진다.

  

아이고메, 무진이 딸내미는 참말로 효녀도 효녀다!”

  

연화가 뒤돌아보았다.

  

아주머니도 아무것도 안 들었잖여!”

  

끝순네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

  

그러고는 머리 위의 광주리를 손으로 툭 쳤다.

  

니 눈에는 이게 안 보이냐?”

  

거기 뭐 들었는디요?”

  

뭐가 들었든 니가 뭔 상관이여.”

  

연화가 가까이 다가가자 끝순네가 황급히 광주리를 뒤로 감췄다.

  

보지 마!”

  

뭔디 그래요?”

  

엿이여.”

  

?”

  

연화의 눈이 반짝였다. 끝순네가 혀를 찼다.

  

괜히 말했네.”

  

연화가 곁에 딱 붙었다.

  

하나만 줘요.”

  

싫어.”

  

하나만.”

  

안 돼.”

  

조그만 거.”

  

귀찮게 허지 말고 가.”

  

연화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아주머니 대신 광주리 들어줄게요.”

  

니가?”

  

끝순네가 연화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아까 볏섬은 못 든다며?”

  

볏섬은 무겁잖여.”

  

그럼 내 광주리는 가볍고?”

  

엿은 가볍잖여.”

  

끝순네가 어이없다는 듯 무진을 바라보았다.

  

무진아.”

  

.”

  

저 입은 누구 닮았냐?”

  

무진이 대답했다.

  

지 에미.”

  

뒤에서 연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무진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사람들이 웃었다.

  

새벽안개 속으로 웃음이 퍼졌다.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올해 농사가 풍년이었어도 겨울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배고픈 중에도 웃었다. 웃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날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옛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진성창에 이르자 연화는 입을 벌렸다.

  

.”

  

창고가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채가 강을 따라 늘어서 있었고, 사람과 소와 수레가 뒤엉켰으며, 곡식 자루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관리들이 소리를 질렀다.

  

줄을 맞추시오!”

  

고을을 밝히시오!”

  

다음!”

  

연화는 아버지 옷자락을 잡았다.

  

아부지.”

  

.”

  

저게 다 쌀이에요?”

  

그런갑다.”

  

누가 다 지었어요?”

  

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화가 다시 물었다.

  

아부지.”

  

.”

  

누가 다 지었냐고.”

  

무진은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굽은 허리, 갈라진 손, 해에 그을린 얼굴들이 거기 있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지었제.”

  

마침내 무진의 차례가 왔다. 볏섬을 내려놓자 관리 하나가 곡식을 살폈고, 젊은 서리가 장부를 펼쳤다.

  

어느 고을인가?”

  

임피입니다.”

  

어느 마을?”

  

무진이 대답했다. 붓이 서걱서걱 움직였다.

  

다음.”

  

끝이었다.

  

무진은 빈 지게를 들었다. 그러나 연화는 움직이지 않고 장부를 쓰던 서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서리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느냐?”

  

연화가 물었다.

  

우리 아부지 이름은 안 물어봐요?”

  

주변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무진이 황급히 딸의 팔을 잡았다.

  

가자.”

  

연화가 버텼다.

  

근디 왜 이름은 안 물어보는디요?”

  

서리가 웃었다.

  

이름이 왜 필요하냐?”

  

아부지가 키운 쌀이잖여.”

  

사람 몇이 웃었다. 하지만 서리는 웃지 않았다. 연화가 다시 물었다.

  

쌀이 누구 건지는 적으면서, 키운 사람이 누군지는 왜 안 적어요?”

  

무진이 딸의 팔을 끌었다.

  

고만 혀.”

  

연화가 자꾸 뒤를 돌아보는 동안, 서리는 한동안 그 아이를 바라보다가 장부로 눈을 돌렸다. 다음 곡식이 들어오고, 다음 사람이 오고, 또 다른 마을 이름이 적혔다.

  

그러나 사람의 이름은 적히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에 연화가 물었다.

  

아부지.”

  

.”

  

쌀은 누가 키웠는지 말 못 해요?”

  

무진이 딸을 바라보았다.

  

쌀이 말을 어찌 허냐.”

  

입이 없어서?”

  

그려.”

  

그럼 누가 말해야 혀?”

  

무진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끝순네가 옆에서 말했다.

  

니가 혀.”

  

연화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그래. 니가 말이 제일 많잖여.”

  

사람들이 다시 웃었다. 연화만 웃지 않았다. 그 아이는 진지했다.

  

그럼 내가 기억할게요.”

  

무진이 물었다.

  

?”

  

연화는 말했다.

  

저 쌀을 아부지가 키웠다는 거.”

  

무진의 걸음이 멈췄다. 가을바람이 지나가고, 수확이 끝난 논 위로 마른 볏짚이 흔들렸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한다.

  

열두 살 아이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천 년을 건너갈 이야기의 첫 문장이 될 것이라는 것을.


―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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