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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미(米)’

군산신문2026-09-14 10:08:25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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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호 (사)서수면사람들 이사장


ㅣ제4쌀은 떠나도 볍씨는 남겨야 혀


곡식을 실은 배가 안개 속으로 사라진 뒤에도 연화는 한동안 강가에 서 있었다. 쌀은 강을 따라 바다로 갔고, 사람들은 다시 들판으로 돌아왔다.

 

세월은 물처럼 흘렀다.

 

무진이 죽은 것은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겨울이었다거창한 병은 아니었다. 기침을 오래 했을 뿐이었다

 

농부에게 아프다는 말은 늘 뒤로 밀리는 법이었다. 논부터 봐야 했고, 둑부터 고쳐야 했고, 소에게 여물을 줘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무진은 일어나지 못했다. 연화가 아버지 곁에 앉았다.

 

볍씨는?”

 

있어요.”

 

보여줘.”

 

연화가 작은 항아리를 가져왔다. 지난해 골라둔 씨앗이 들어 있었다. 무진이 웃었다.

 

잘 골랐네.”

 

아부지가 가르쳐줬잖여.”

 

내가?”

 

벌써 잊었어요?”

 

무진의 웃음이 기침으로 바뀌었다. 연화는 아버지의 등을 두드렸다.

 

아부지, 안 죽을 거지?”

 

무진은 한참 말이 없었다.

 

사람은 다 죽어.”

 

그런 말 하지 마.”

 

안 한다고 안 죽냐.”

 

연화가 울자 무진이 말했다.

 

울지 마. 니가 울면 시끄러워.”

 

연화는 울면서도 웃었다.

 

누구 딸인데.”

 

무진도 희미하게 웃었다. 잠시 뒤 그가 물었다.

 

내 이름 기억허냐?”

 

아부지 이름을 왜 몰라!”

 

말해봐.”

 

무진. 농부 무진. 그리고 내 아부지.”

 

무진이 눈을 감았다.

 

그거면 됐다.”

 

장례가 끝난 뒤 연화는 관아로 갔다. 오래전 진성창에서 농부의 이름은 묻지 않고 고을과 곡식만 적었던 서리를 찾아간 것이다. 젊었던 서리 만복은 어느새 중년이 되어 있었다.

 

절 기억혀요?”

 

만복이 연화를 한참 바라봤다.

 

누구더라.”

 

연화.”

 

만복의 눈이 커졌다.

 

쌀자루는 적으면서 왜 농부 이름은 안 적느냐고 따졌던 아이.”

 

기억하네.”

 

그때 네 말 때문에 밤새 생각했다.”

 

답은 찾았어요?”

 

만복은 고개를 저었다.

 

못 찾았다.”

연화가 말했다.

 

우리 아부지가 죽었어요. 이름은 무진이에요.”

 

만복은 붓을 들어 종이에 썼다.

 

무진.

 

연화는 그 글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이제 안 없어져요?”

 

종이가 남아 있는 동안은.”

 

종이가 없어지면?”

 

만복이 대답하지 못하자 연화가 말했다.

 

내가 기억할게.”

 

그럼 된다.”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에게 말해.”

 

그 사람도 죽으면?”

 

또 다른 사람에게.”

 

연화가 물었다.

 

그럼 천 년 갈 수 있어요?”

 

만복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한테 천 년은 길지. 하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넘기면 생각보다 짧을 수도 있다.”

 

그날 만복은 종이에 세 가지를 남겼다. 무진, 연화, 그리고 빈칸 하나였다.

 

저건 뭐여?”

 

다음 사람 자리.”

 

누군데?”

 

아직 모르지.”

 

그날 밤 연화는 볍씨를 손에 올렸다. 한 알이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 씨앗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사람도, 이름도, 기억도 그랬다. 그 무렵부터 사람들 사이에 한마디가 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쌀은 떠나도 볍씨는 남겨야 혀.”

 

사람들은 그것을 농사 이야기로 들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다.

 

연화가 죽고 만복도 죽었다. 억쇠는 어느 날 배를 타고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끝순네가 여든을 넘겼는지, 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물쇠 영감의 진짜 이름은 끝내 아무도 몰랐다.

 

사람들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러나 들판은 남았다. 봄이면 모를 심었고, 여름이면 물을 보았고, 가을이면 벼를 베었다.

 

그사이 왕이 바뀌고 전쟁이 일어났다. 1358년 왜구가 금강 하구의 진성창을 덮쳤다는 소식이 임피의 마을들을 흔들었다

 

창고의 곡식이 불타고 빼앗겼다는 말이 돌았고, 바다 가까운 창고를 안쪽으로 옮기라는 명령도 내려왔다

 

누구는 나라의 곡식을 지켜야 한다고 했고, 누구는 먼저 가족을 피신시켜야 한다고 했다. 창고가 털리면 백성이 다시 곡식을 채워야 한다는 것을 농부들은 알고 있었다.

 

나라 창고부터 지켜야 혀!”

 

사람들은 밤새 볏섬을 옮겼다. 그런데 한 농부는 자기 집으로 달려가 종자로 쓸 볍씨 항아리를 마루 밑에 묻었다.

 

관아 쌀은 안 옮겨?”

 

아들이 묻자 농부가 대답했다.

 

나라 쌀은 올해를 먹이지만, 볍씨는 내년을 먹이는 겨.”

 

13808월에는 진포에 왜선 수백 척이 들이닥쳤다는 소문이 퍼졌다. 고려 수군이 새로 만든 화포로 왜선을 불태웠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장터에서는 술 한 사발을 돌렸고, 아이들은 불붙은 배가 바다를 가득 메웠다며 보지도 못한 광경을 떠들었다. 그러나 늙은 뱃사람 하나는 웃지 않았다.

 

배를 잃은 놈들이 어디로 가겄냐.”

 

그 말대로 퇴로를 잃은 왜구는 옥주와 영동, 선산과 상주를 지나며 내륙을 약탈했다

 

진성창의 남은 곡식을 다시 뒤졌다는 소문도 돌았다. 누구도 그것을 직접 보았다고 나서지는 못했지만, 빈 창고와 불탄 집을 본 사람은 있었다.

 

왜구는 마침내 남원 운봉 쪽으로 몰렸고, 그해 9월 황산에서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크게 패했다.

 

이성계가 누구여?”

 

북쪽에서 온 장수라더라.”

 

왜구만 다시 안 오면 누구든 상관없어.”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 장수가 열두 해 뒤 새 왕조를 세우리라고는 아무도 몰랐다.

 

전쟁이 지나갈 때마다 창고는 비었고 사람은 사라졌다. 그러나 봄이 오면 살아남은 이들이 다시 논으로 들어갔다

 

무너진 둑을 쌓고, 불탄 집터에서 농기구를 찾아내고, 겨우 지켜낸 볍씨를 물에 담갔다

 

나라는 백성에게 창고를 먼저 지키라 했지만 농부들은 볍씨를 지켜야 창고도 다시 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390년에는 금강을 더 거슬러 올라간 용안에 득성창이 세워졌다. 진성창으로 모이던 세곡의 길이 달라지면서 오래도록 북적이던 강가도 차츰 조용해졌다

 

큰 창고의 역할은 줄었지만, 물길과 들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1392년 고려가 끝나고 조선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들판의 농부에게 나라가 바뀌었다는 소식은 늦게 왔다

 

다복이 논에서 김을 매고 있을 때 장돌뱅이 하나가 소리쳤다.

 

왕이 바뀌었대!”

 

다복이 허리를 폈다.

 

새 왕 이름이 뭔디?”

 

장돌뱅이가 입을 다물자 옆의 농부가 웃었다.

 

왕 이름도 모르면서 뭘 알려준다고 소리여.”

 

중요한 건 나라가 바뀌었다는 거여!”

 

다복이 물었다.

 

그럼 세금 안 내?”

 

그건 내겄지.”

 

군역은?”

 

그것도 허겄지.”

 

그럼 뭐가 달라졌어?”

 

장돌뱅이가 생각하다 말했다.

 

왕이 달라졌잖여.”

 

다복은 다시 허리를 숙였다.

 

왕은 서울에 있고 나는 논에 있는디.”

 

사람들이 웃었다. 장돌뱅이가 소리쳤다.

 

무식한 놈들!”

 

다복이 대꾸했다.

 

배고픈 무식쟁이한테 밥이라도 한 끼 사주고 욕혀!”

 

그렇게 새 나라가 세워지고 법과 관리가 바뀌었다. 하지만 봄은 그대로 왔다. 어느 날 다복의 어머니가 마루에서 좋은 볍씨를 따로 고르고 있었다.

 

먹으면 되잖여.”

 

씨앗까지 먹으면 내년에 뭘 심을래?”

 

어머니는 볍씨를 항아리에 담으며 중얼거렸다.

 

어른들이 그랬어. 쌀은 떠나도 볍씨는 남겨야 헌다고.”

 

누가 그랬는디?”

 

어머니는 한참 생각했다.

 

몰라.”

 

엄니가 지어낸 거 아녀?”

 

빗자루가 날아왔고 다복은 논둑까지 도망쳤다.

 

그 말은 이미 주인을 잃었지만 살아 있었다. 고려가 끝나고 왕이 바뀌었어도 말은 사람의 입에서 다음 사람의 귀로 건너갔다. 볍씨처럼.

 

강물은 수많은 배와 전쟁을 흘려보냈다. 사람의 이름은 사라져도 물은 그들이 지킨 들판을 지나갔다. 시대는 바뀌어도 논은 남았다.

 

 ―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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