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호 (사)서수면사람들 이사장
ㅣ제6회 볍씨를 남기는 사람들ㅣ
조선 후기로 접어들 무렵, 임피 장터에 낯선 선비 하나가 나타났다.
옷은 낡았지만 등에 진 보따리에는 책이 여러 권 들어 있었다. 이름은 윤서재라고 했다. 진짜 이름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농부 끝돌이 선비에게 막걸리 한 사발을 건넸다.
“선비 양반은 어디 가는 길이오?”
“남쪽을 돌아보는 중이오.”
“뭘 보려고?”
“땅과 물을 보러 다니오.”
끝돌이 웃었다.
“그걸 책으로 보오? 논에 한번 들어오면 금방 아는디.”
선비도 따라 웃었다.
“그래서 직접 보러 다니는 것이오.”
막걸리가 한 순배 돌자 윤서재가 호남의 큰 못 이야기를 꺼냈다.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이름난 큰 못이 셋 있었소. 황등제와 벽골제, 눌제요.”
“큰 못 하나 고치면 백성들이 안 굶는다고?”
“가뭄에는 큰 도움이 되겠지요.”
“그럼 왜 안 고쳐?”
윤서재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끝돌이 빈 사발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책에도 안 나와?”
“책에는 답이 있어도 사람이 따르지 않을 때가 많소.”
“그럼 책이 무슨 소용이여.”
“그래서 나도 고민 중이오.”
“선비 양반은 솔직해서 마음에 드네.”
다음 날 두 사람은 오래된 제방을 보러 갔다. 끝돌의 딸 초희도 뒤따라 나섰다.
“너는 왜 따라오냐?”
“심심해서.”
“집에 있어. 여자가 어딜.”
초희가 걸음을 멈추었다.
“왜 여자는 안 되는디?”
끝돌은 입을 다물었다. 윤서재가 웃으며 말했다.
“같이 가게 두시오.”
“세상이 말세여.”
“세상이 말세가 아니라 아버지가 먼저 늙은 겨.”
제방에 닿은 초희는 두 손으로 오래된 흙을 만졌다.
“이 큰 둑을 누가 만들었어요?”
“아주 오래전 사람들이 만들었겠지.”
“그 사람들 이름은 뭐여?”
“모르오. 아마 수많은 사람이 함께 만들었을 것이오.”
“큰일을 한 사람들 이름은 왜 맨날 없는 겨?”
이번에는 선비도 대답하지 못했다. 끝돌이 딸을 나무랐다.
“쓸데없는 소리 말어.”
“아버지 이름도 나중에는 없어질 텐디.”
“내 이름이 왜 없어져!”
“누가 적어줘?”
끝돌은 또 입을 다물었다. 윤서재가 웃자 끝돌이 버럭 소리쳤다.
“왜 웃어!”
“따님이 영리해서 그러오.”
“저건 영리한 게 아니라 말이 많은 겨.”
초희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아버지는 말도 많고 생각은 적잖여.”
이번에는 선비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날 밤 윤서재는 등잔불 아래에서 자신이 본 것을 적었다. 세 개의 큰 못, 낡은 둑, 물을 기다리는 농부들. 그러다 붓을 든 채 한참 망설였다. 마침내 기록 한쪽에 짧은 문장을 남겼다.
초희, 농부 끝돌의 딸.
그 기록이 얼마나 오래 남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날 밤만큼은 초희가 이름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수많은 농부가 흙으로 쌓은 둑 위에 한 아이의 이름이 글자로 남았다.
세월은 다시 흘렀다. 조선의 마지막이 가까워질수록 세금은 무거워졌고 탐관오리와 민란에 관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봄은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때가 되면 논을 갈고 모를 심어야 했다.
덕룡의 집에서는 해마다 여인들이 먼저 볍씨를 골랐다. 할머니 귀덕과 며느리 순임, 열여섯 살 옥례가 마루에 둘러앉았다. 옥례가 볍씨 한 알을 집어 들었다.
“이거 좋아?”
“버려.”
“왜?”
“가벼워.”
“그럼 이건?”
“남겨. 그건 단단혀.”
옥례가 입을 삐죽였다.
“다 똑같아 보이는디.”
“사람 눈에는 그래도 땅은 안 속는다.”
“땅에 눈이 있어?”
“있제.”
귀덕은 손녀의 이마를 툭 쳤다.
“여기.”
“아!”
순임이 웃음을 터뜨렸다. 옥례는 좋은 것과 병든 것, 속이 찬 것과 빈 것을 다시 골랐다. 귀덕의 손은 망설임이 없었다.
“할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오래 했으니께.”
“몇 년?”
“니 나이 세 배.”
“할머니 마흔여덟이야?”
귀덕의 손이 멈췄다.
“내가 그렇게 늙어 보여?”
“아니.”
옥례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고 순임은 배를 잡고 웃었다.
밤이 되자 귀덕은 방 안 깊숙한 곳에서 작은 항아리를 꺼냈다.
“그게 뭐여?”
“볍씨.”
“또?”
“이건 따로 남겨둔 거여. 우리 할머니한테 들은 말이 있거든.”
“뭔디?”
“쌀은 떠나도 볍씨는 남겨야 혀.”
“누가 처음 한 말인디?”
“모르지.”
“그럼 왜 믿어?”
귀덕은 볍씨 몇 알을 손바닥에 올렸다.
“맞는 말이니께.”
“쌀을 다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이잖여.”
“그것만은 아녀. 사람이 가진 걸 다 써버리면 다음이 없는 겨.”
“돈도?”
“그려.”
“마음도?”
귀덕은 잠시 생각했다.
“그것도.”
“사람도?”
“사람은 떠나도 말이 남고, 이름이 남고, 자식이 남제. 자식이 없어도 다른 사람 마음에 남을 수 있고.”
옥례는 한참 볍씨를 바라보다 말했다.
“나는 이름을 남기고 싶어.”
“뭘 했다고.”
“앞으로 하면 되제.”
“뭘?”
“아직 몰라.”
귀덕이 웃었다.
“그럼 오래 살아라.”
“할머니는 이름 남기고 싶지 않아?”
귀덕은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나는 니가 기억하면 됐다.”
옥례는 할머니 손을 꼭 잡았다.
“기억할게.”
그러나 사람은 약속보다 먼저 잊을 때가 있었다. 얼굴이 흐려지고 목소리가 사라진 뒤에는 이름마저 남지 않았다. 그래서 이야기가 필요했다. 이야기는 사람이 떠난 자리에 그 사람을 다시 불러오는 일이었다.
갑오년 어느 장날, 장돌뱅이 만수가 임피 장터로 뛰어들었다.
“큰일 났어! 동학군이 일어났대!”
사람들은 나라가 흔들린다고 수군거렸다. 외국 군대가 들어오고 새로운 제도가 생긴다는 소문도 들렸다.
늙은 농부 만돌이 말했다.
“세상이 사람을 못살게 하면 사람이 세상을 뒤집는 법이여.”
누군가 주위를 살피며 입을 막았다.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마.”
“나는 늙어서 겁도 없어.”
장터 여인 춘매가 코웃음을 쳤다.
“늙은 양반이 저번에 감기 걸리고 죽는다고 울었다며.”
“안 울었어!”
장터에 웃음이 번졌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얼마 뒤 바닷가에서 돌아온 상인이 일본 사람들이 군산과 서쪽의 좋은 땅을 살펴보고 있다는 소문을 전했다.
“남의 땅을 왜 본대?”
“사려고 그러겄지.”
“돈 많이 주면 파는 사람도 있을 테고.”
만돌은 손으로 흙 한 줌을 집어 들었다. 흙이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논은 돈으로만 사는 게 아녀.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여.”
열일곱 살 옥례는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탑천 가까운 들길을 걸었다.
아직 이 들판 전체를 ‘서수’라고 부르기 전이었다. 마을마다 이름이 달랐지만 논과 물길은 서로 이어져 있었다.
옥례의 손에는 귀덕이 건네준 볍씨 몇 알이 들어 있었다.
바람 끝에 희미한 바다 냄새가 묻어왔다. 옥례가 논둑 너머를 바라보다 걸음을 멈췄다.
옷차림도 말도 다른 낯선 사람들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들판을 가리켰고, 다른 사람은 장부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농부가 논을 볼 때는 하늘과 물을 먼저 보고 흙을 만졌다. 그러나 그들은 땅의 크기와 경계를 재고 있었다.
얼마나 거둘 수 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가질 수 있는지를 헤아리는 눈이었다.
뒤에서 아버지 덕룡이 소리쳤다.
“옥례야! 어두워진다. 빨리 와!”
“알았어!”
옥례는 손안의 볍씨를 힘주어 쥐었다. 귀덕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씨앗 몇 알만이 아니었다. 들판을 바라보는 눈과, 다음 사람에게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를 묻는 마음도 함께 물려받았다.
옥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저 낯선 눈길이 머지않아 이 들판의 주인을 바꾸고, 자신이 물려받은 삶까지 흔들게 되리라는 것을.
― 다음 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