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신문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메인 메뉴


콘텐츠

문학과 문화가 있는 공간

‘천년의 미(米)’

군산신문2026-09-23 09:30:24 링크 인쇄 공유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최연호 (사)서수면사람들 이사장


ㅣ제7회 낯선 사람들이 들판으로 들어왔다ㅣ

   

1905년 봄옥례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열일곱 살 때 들판 끝에 서 있던 낯선 사람들을 처음 보았으니, 어느덧 열한 해가 흘렀다.

  

그동안 옥례는 기석과 혼인해 작은 초가에서 살았다. 아들을 하나 낳았지만 세 살을 넘기지 못하고 떠나보냈다. 그 뒤로 한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옥례를 만나면 조심스럽게 물었다.

  

좋은 소식 없냐?”

  

처음에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이요.”

  

두 번째도 웃었다.

  

때 되면 생기겄지요.”

  

세 번째부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묻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싫었다. 악의가 있으면 화라도 낼 텐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 사람에게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옥례는 대신 논으로 갔다. 모를 심고 김을 맸으며 가을이면 벼를 베었다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었지만 논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심지 않으면 나지 않았고, 물을 주지 않으면 말랐으며, 때가 되면 고개를 숙였다


옥례는 논이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날도 옥례와 기석은 논두렁에 앉아 새참을 먹고 있었다


기석이 보리밥 한 덩이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저 사람들 또 왔네.”

  

옥례가 고개를 들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논 건너편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일본인 몇 명과 조선인 통역, 줄과 자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이 땅에 말뚝을 박았고 다른 사람은 종이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

  

쇠메가 나무를 때리는 소리가 빈 들판을 건너왔다.

  

뭐 허는 겨?”

  

땅 재는 거겄지.”

  

남의 땅을 왜 재?”

  

기석은 대답하지 않다가 잠시 후 말했다.

  

산다는 말이 있더라.”

  

누가 판대?”

  

파는 사람도 있겄지.”

  

옥례는 보리밥을 내려놓았다.

  

저 논은 누구 거여?”

  

기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진사네 땅 아닌가?”

  

그 옆은?”

  

최 서방네.”

  

그 옆은?”

  

기석이 피식 웃었다.

  

내가 지적장부냐?”

  

옥례는 웃지 않았다. 남자들이 다음 논으로 옮겨가 말뚝을 하나 더 박았다.

  

.

  

못이 박히는 소리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마지막으로 닫히는 소리 같았다


옥례에게는 땅이 얻어맞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저 말뚝이 싫어.”

  

말뚝이 뭔 죄여.”

  

저 사람들이 싫다는 겨.”

  

기석이 주변을 살폈다.

  

목소리 낮춰.”

  

?”

  

그냥.”

  

일본 사람 욕하면 논이 도망가?”

  

옥례야.”

  

.”

  

세상이 달라졌어.”

  

옥례가 남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뭐가 달라졌는디?”

  

기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라의 이름은 아직 그대로였고 왕도 관청도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일본 순사가 돌아다녔다. 일본인이 땅을 샀다군산으로 쌀이 모였다. 낯선 말과 새로운 서류가 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전보다 목소리를 낮췄다. 그것이 달라진 세상이었다.

  

그해 4, 가와사키 도타로라는 일본인이 서수리에 농장을 열었다


그는 일본 니가타에서 사무원과 농사일을 아는 사람들까지 데려왔다

  

이미 확보한 땅을 바탕으로 농장을 넓혀갔고, 그 뒤에는 일본 공사관과 경찰의 힘이 있었다.

  

처음 농장사무소가 들어설 때만 해도 구경하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낯선 농기구와 종자 자루가 마당에 쌓였고 일본말을 하는 사무원들이 장부를 들고 분주하게 오갔다

  

농사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논의 물길과 흙의 상태를 살폈다.

  

아이들은 멀찍이 서서 그 광경을 구경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쫓아내면서도 자신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뭘 저렇게 많이 가져왔대?”

  

농사지을 거라잖여.”

  

농사는 땅하고 물만 있으면 되는 거 아녀?”

  

돈도 있어야제.”

  

저 사람들은 돈도 많고 뒤를 봐주는 사람도 많다더라.”

  

누군가 그 말을 하자 사람들이 잠시 조용해졌다농부들에게 농사는 봄부터 가을까지 몸으로 짓는 일이었다


그러나 새로 들어온 농장은 돈과 장부, 경찰의 힘까지 함께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며칠 뒤 논둑의 말뚝에는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와 숫자가 적힌 작은 표지가 붙었다

  

어느 논은 이미 농장 땅이라고 했고, 어느 논은 곧 사들이기로 했다고 했다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소문은 물길보다 빠르게 마을을 돌았다.

  

돈을 많이 준다더라.”

  

받았다는 사람은 누구여?”

  

그건 모르지.”

  

또 모르면서 말허네.”

  

그런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사람들은 자기 논의 경계부터 확인했다


어제까지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던 논두렁이 갑자기 불안해졌다.

  

말뚝이 자기 논 쪽으로 한 뼘이라도 기울어 있으면 가슴이 철렁했다.

  

옥례는 저녁마다 아래 논에 나가 경계를 살폈다. 기석이 타박했다.

  

말뚝이 밤사이에 걸어오겄어?”

  

사람이 옮길 수는 있잖여.”

  

누가 남의 말뚝을 옮겨.”

  

남의 논을 재는 사람도 있는디, 말뚝이라고 못 옮기겄어?”

  

기석은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의 생각은 서로 달랐다.

  

저 일본인이 농사를 잘 안대.”

  

니가타라는 데가 쌀로 유명하다더라.”

  

새 농사법을 배우면 우리한테도 좋은 거 아녀?”

  

늙은 최만돌이 코웃음을 쳤다.

  

남이 니 논 봐주겠다고 들어오면 고마워할 겨?”

  

농사법을 가르쳐준다잖여.”

  

세상에 공짜로 가르쳐주는 놈이 어디 있어.”

  

왜 맨날 나쁘게만 생각혀?”

  

만돌은 논 건너편의 말뚝을 바라보았다.

  

나쁘게 생각하는 게 아녀. 오래 살아서 의심이 많은 겨.”

  

장터 여인 춘매가 끼어들었다.

  

오래 산 건 맞네.”

  

뭔 소리여?”

  

저번 장날에도 똑같은 얘기 했잖여.”

  

내가?”

  

그려.”

  

기억 안 나는디.”

  

그러니 오래 살았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만돌이 씩씩거렸다.

  

이놈의 동네는 노인 공경을 몰라!”

  

춘매가 말했다.

  

공경은 하는디, 거짓말까지 믿어드릴 수는 없잖여.”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옥례는 웃지 않았다

  

멀리서 일본인들이 논의 크기를 재고 경계를 표시하고 있었다.

  

한 자.

  

두 자.

  

세 자.

  

농부가 논을 볼 때는 하늘과 물을 먼저 보고 흙을 만졌다. 모가 얼마나 자랄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땅의 넓이와 경계를 재고 숫자를 적었다. 얼마나 거둘 수 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가질 수 있는지를 헤아리는 눈이었다.

  

평생 흙을 밟으며 살아도 농부가 알지 못했던 숫자들이 종이 위에 나타났다

  

숫자가 붙자 경계가 선명해졌고, 경계가 선명해지자 주인을 바꿀 준비도 쉬워졌다.

  

옥례는 문득 귀덕 할머니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쌀은 떠나도 볍씨는 남겨야 혀.

  

그러나 옥례는 처음으로 그 말의 다음을 생각했다.

  

볍씨를 남겨도 땅이 없으면 어디에 심는가.

  

그해 봄 사람들이 일본에서 온 이들을 바라볼 때, 그들이 들고 온 것은 장부와 자와 종자뿐인 줄 알았다

  

아직 아무도 몰랐다. 들판에 박힌 작은 말뚝 하나가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깊이 박히게 될지를.

   

다음 회에 계속


  

※ 군산신문사의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카피라이터

LOGIN
ID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