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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미(米)

군산신문2026-10-19 09:27:42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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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호 (사)서수면사람들 이사장

  

ㅣ제13회 풍년인데 배고픈 사람들ㅣ

 

1924년 가을은 풍년이었다.

  

벼는 논마다 누렇게 익었고 이삭은 낟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고개를 숙였다. 들판만 보면 누구도 굶을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추수가 끝나자 기석의 마당에도 볏섬이 높이 쌓였다. 복순은 볏짚 냄새를 맡으며 손으로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기석이 웃었다.

  

“그걸 언제 다 세려고.”

  

“우리 것이 몇 개인지 알아야제.”

  

기석의 웃음이 사라졌다.

  

“다 우리 것은 아녀.”

  

“우리가 심었잖여.”

  

“그래도.”

  

“우리가 물 댔고 김맸고 벼도 베었잖여.”

  

“복순아.”

  

“그런디 왜 우리 것이 아녀?”

  

기석은 볏섬을 보았다. 딸이 어릴 적부터 되풀이한 질문이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대답은 나아지지 않았다.

  

농장 관리인이 수확량을 확인하러 왔다. 볏섬을 세고 장부에 숫자를 적었다. 기석은 그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읽을 수 없었다.

  

“올해 소작료가 얼마나 됩니까?”

  

관리인이 숫자를 말했다.

  

기석의 얼굴이 굳었다.

  

“그렇게 많이요?”

  

“규정이오.”

  

“수세도 내야 허고, 종자값도 갚아야 허는디.”

  

“그것은 당신 사정이오.”

  

“그러면 우리 먹을 것이….”

  

관리인이 말을 잘랐다.

  

“다른 소작인들도 똑같소.”

  

기석은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 왜 자기 고통을 참아야 할 이유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가와사키가 죽은 지 세 해가 지났지만 농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주인은 죽어도 장부는 남았고, 소작료도 남았다. 

  

논의 경계와 창고의 자물쇠도 그대로였다. 농민에게 농장주의 죽음보다 중요한 것은 내년에도 이 논을 부칠 수 있느냐는 일이었다.

  

관리인이 돌아가자 옥례가 물었다.

  

“얼마나 떼 간대?”

  

기석이 숫자를 말했다.

  

옥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우리 것은 뭐여?”

  

“남는 게 있겄지.”

  

“얼마나?”

  

“계산해봐야.”

  

옥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신은 왜 맨날 계산해봐야 안다고 혀!”

  

“그럼 내가 어쩌라고!”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봤다. 화를 낼 사람은 따로 있었지만, 눈앞에는 서로밖에 없었다.

  

복순이 둘 사이로 들어섰다.

  

“싸우지 마.”

  

“넌 들어가 있어.”

  

“왜 맨날 나만 들어가 있으래?”

  

옥례가 말했다.

  

“어른들 일이여.”

  

“쌀 심을 때는 나도 일했잖여.”

  

복순은 마당의 볏섬을 가리켰다.

  

“누가 모 심었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누가 김맸어?”

  

“우리가 했지.”

  

“누가 물꼬 봤어?”

  

“우리가.”

  

“누가 벼 베었어?”

  

기석이 낮게 말했다.

  

“우리가 했어.”

  

복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근디 왜 우리 것이 아녀?”

  

옥례는 딸을 바라보았다. 몇 해 전 빼앗긴 아래 논 앞에서 자신도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어쩌면 천 년 전 진성창에 쌀을 바치던 농부도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다.

  

소작료로 나갈 볏섬이 먼저 마당을 떠났다. 그다음에는 수세와 빚을 갚을 몫이 빠졌다. 종자값과 거름값도 제했다. 높았던 볏섬은 하루가 다르게 낮아졌다.

  

마지막 수레가 나간 뒤 복순이 빈 마당을 보며 말했다.

  

“풍년 맞어?”

  

옥례가 대답했다.

  

“논에는 풍년이제.”

  

“우리 집은?”

  

“글쎄다.”

  

풍년은 들판의 말이었다. 가난은 부엌의 말이었다.

  

그날 밤 세 식구는 보리밥을 먹었다. 꽁보리는 씹을수록 껄끄러웠고 된장은 짰다. 등잔 기름을 아끼려고 심지를 낮춘 방 안은 어두웠다. 

  

농장 창고에는 잘 도정된 흰쌀이 가득했고, 군산항에서는 쌀가마가 일본행 배에 오르고 있었다.

  

옥례가 밥을 씹다가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쌀을 키우는 사람들이 그 쌀을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구먼.”

  

기석이 주위를 살폈다.

  

“그만 혀.”

  

“왜.”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옥례가 방문을 가리켰다.

  

“바람이 농장에 일러바치기라도 혀?”

  

“복순이가 듣잖여.”

  

옥례는 딸을 바라봤다.

  

“들으라고 허는 소리여.”

  

복순은 말없이 보리밥을 씹었다. 밥알 사이에 섞인 돌을 하나 골라 상 위에 놓았다.

  

“금상 받은 쌀에는 돌도 없겄지?”

  

기석이 말했다.

  

“사람들이 하나하나 골라냈으니께.”

  

“우리 밥 돌은 누가 골라내?”

  

옥례가 웃었다.

  

“니가.”

  

“그럼 나도 상 줘.”

  

기석이 처음으로 웃었다.

  

“무슨 상?”

  

“돌 잘 고르는 상.”

  

“금으로 만들어 달라고 혀.”

  

복순이 상 위의 돌을 집어 들었다.

  

“이게 금이라고 생각하지 뭐.”

  

세 사람은 잠시 웃었다. 가난한 밥상에서도 농담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웃음이 멎자 빈 쌀독이 다시 보였다.

  

소작료만 문제가 아니었다. 물에도 돈이 붙었다. 수리조합에서 수세를 걷었고 새 수로를 낸 비용도 농민 몫으로 돌아왔다. 물이 논으로 들어오면 벼가 자랐지만, 수세 장부의 숫자도 함께 자랐다.

  

어느 날 복순은 아버지와 물길을 따라 걸었다.

  

“아부지.”

  

“왜.”

  

“물은 누구 거여?”

  

기석이 웃었다.

  

“흐르는 물에 주인이 어디 있겄냐.”

  

“근디 물 쓰면 돈 낸다며.”

  

기석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려.”

  

“그럼 돈 받는 사람이 물 주인이네.”

  

기석은 딸을 빤히 바라봤다.

  

“너는 니 엄니보다 더 골치 아프겄다.”

  

뒤에서 옥례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기석이 걸음을 재촉했다.

  

복순이 웃으며 뒤따랐다.

  

“아부지, 또 도망가?”

  

“도망은 무슨. 해 지기 전에 물꼬 보려는 겨.”

  

가족의 웃음소리가 물길을 따라 흩어졌다. 아직은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을 곳곳의 쌀독은 비어갔다. 쌀을 빌려 봄을 넘기고, 가을이면 이자를 붙여 갚는 집이 늘었다. 

  

아이들은 흰쌀밥을 잊어갔고 어른들은 장터에서 쌀값 이야기를 하다 목소리를 낮췄다.

  

장터에서는 같은 쌀이 농민의 손을 떠난 뒤 더 비싼 값에 거래됐다. 

  

기석은 자기가 넘긴 쌀과 비슷한 쌀자루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살 거요?”

  

쌀가게 주인이 묻자 기석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은 쌀을 내가 돈 주고 사야 허는구먼.”

  

주인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주판알만 튕겼다.

  

“올해는 풍년인디 왜 더 힘들어?”

  

“많이 나면 뭐 혀. 우리 몫이 아닌디.”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혀?”

  

누군가 그렇게 물으면 예전에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한두 사람이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러게 말이여.”

  

작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같은 질문과 같은 대답이 마을마다 쌓였다. 

  

소작료에 대한 불만, 수세에 대한 원망, 문서를 읽지 못해 당한 억울함이 빈 쌀독 속에서 메아리쳤다.

  

복순은 어느 날 농장 앞길에서 버려진 종이 한 장을 주웠다. 한자와 일본어, 숫자가 빼곡했지만 읽을 수 없었다. 자기 집의 소작료를 정한 종이인지, 누군가의 땅을 넘긴 문서인지도 알 수 없었다.

  

복순은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기록에는 농장 이름과 수확량과 돈의 액수가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목소리는 없었다.

  

복순은 생각했다.

  

다음 종이에는 사람들의 이름부터 적어야 한다고.

  

―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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