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호 (사)서수면사람들 이사장
ㅣ제14회 복순, 기록을 시작하다ㅣ
1925년 초겨울, 복순은 품에 넣어 두었던 종이를 다시 꺼냈다.
농장 앞길에서 주운 종이였다. 한자와 일본어, 숫자가 빼곡했지만 복순이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종이 한가운데 찍힌 붉은 도장만 유난히 선명했다.
“엄니.”
“왜.”
“이 종이에 우리 집 이야기도 있을까?”
옥례가 종이를 뒤집어 보았다.
“내가 글을 알아야제.”
“그럼 누가 알아?”
“글 아는 사람.”
“글 아는 사람은 왜 맨날 남의 종이만 읽어?”
옥례가 딸을 보았다.
“그게 뭔 소리여?”
“우리 이야기는 누가 써주냐고.”
옥례는 대답하지 못했다. 농장 장부에는 수확량과 소작료, 수세와 빚이 적혔다.
볏섬의 수는 빠짐없이 기록됐지만, 밤새 물꼬를 지킨 사람의 이름은 없었다. 아이가 아팠던 날도, 끼니를 굶은 사정도 장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복순은 종이의 빈 뒷면에 숯 조각을 대고 줄 하나를 그었다.
“뭐 혀?”
“써보는 겨.”
“뭘?”
복순은 잠시 생각했다.
“오늘 우리 집에서 쌀가마가 몇 개 나갔는지.”
옥례가 픽 웃었다.
“그건 농장에서도 적었을 텐디.”
“그럼 우리는 뭐가 남았는지도 쓸 겨.”
옥례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날부터 복순은 버려진 종이를 모았다. 농장 사무소 근처에 떨어진 전표, 장터에서 물건을 싸준 종이, 아이들이 낙서하다 버린 종이까지 주워 깨끗한 면을 펴놓았다. 글자를 몰랐으므로 처음에는 숫자와 그림뿐이었다.
볏섬 하나는 네모로, 쌀 한 되는 작은 동그라미로 표시했다. 아버지가 수세를 내러 간 날에는 물결을 그렸고, 어머니가 보리쌀을 꾸러 간 날에는 빈 그릇을 그렸다.
기석이 종이를 들여다보다 물었다.
“이 지렁이는 뭐여?”
“지렁이 아녀. 물이여.”
“물이 왜 이렇게 비뚤어졌어?”
“물은 원래 비뚤게 흐르잖여.”
옥례가 웃었다.
“당신 글씨보다는 낫구먼.”
기석이 발끈했다.
“내 글씨가 어때서!”
“내 이름 써봐.”
기석은 헛기침을 하고 마당으로 나갔다.
복순이 소리쳤다.
“아부지, 또 논으로 도망가?”
“물꼬 보러 간다!”
“겨울 논에 무슨 물꼬여!”
옥례와 복순의 웃음이 방문 밖까지 따라갔다.
하지만 복순은 웃고만 있을 수 없었다. 숫자와 그림으로는 사람의 말을 온전히 남길 수 없었다.
그는 마을에서 글을 조금 아는 최 서방을 찾아갔다. 장터에서 남의 편지를 읽어주고 간단한 장부를 대신 써주던 사람이었다.
“글을 배우고 싶다고?”
“예.”
“왜?”
“남이 쓴 종이를 읽고, 내가 본 것도 쓰려고요.”
최 서방은 복순을 한참 바라봤다.
“여자애가 글 배워 어디다 쓰려고 허냐고 니 아버지가 뭐라 안 혀?”
“벌써 뭐라 했어요.”
“그런디 왔어?”
“뭐라 했다고 안 배우면, 뭐라 한 사람 뜻대로 되잖여.”
최 서방이 껄껄 웃었다.
“말로는 벌써 과거 급제했네.”
“과거 급제는 안 혀도 내 이름은 쓰고 싶어요.”
첫날 배운 글자는 ‘복’과 ‘순’이었다. 복순은 붓을 너무 세게 눌러 종이에 먹물을 번지게 했다. 복 자는 한쪽으로 기울었고 순 자는 다리가 짧았다.
“이게 내 이름 맞어요?”
“니가 썼으니 니 이름이지.”
다음에는 쌀, 땅, 물을 배웠다. 복순은 세 글자를 나란히 써놓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평생 눈앞에 있던 것들이 종이 위에서는 낯설었다.
“쌀은 이렇게 생겼네.”
최 서방이 웃었다.
“쌀이 그렇게 생긴 게 아니라 쌀이라는 글자가 그렇게 생긴 겨.”
“글자도 쌀을 닮았으면 외우기 쉬울 텐디.”
“그럼 물은 흐르고 땅에서는 풀이 나야겄네.”
“그게 더 맞잖여.”
복순은 글자를 몇 번이고 베껴 썼다. 쌀 옆에는 볏섬 수를 적고, 물 옆에는 수세로 나간 돈을 표시했다. 땅 옆에는 주인이 바뀐 논의 이름을 적었다.
글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붙잡아두는 힘은 있었다.
복순은 종이를 두 손으로 들었다. 삐뚤고 얼룩졌지만 분명 자기 이름이었다. 남이 불러주는 소리가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옥례를 깨웠다.
“엄니, 이것 봐.”
“뭐여?”
“내 이름.”
옥례가 종이를 받아 들었다.
“잘 썼네.”
“엄니 이름도 배워올게.”
“내 이름은 뭐 하러.”
“엄니도 여기 살았다는 걸 남겨야제.”
며칠 뒤 복순은 ‘옥례’와 ‘기석’을 배워왔다. 옥례는 손가락으로 자기 이름을 천천히 짚었다. 기석은 딸이 써준 이름을 보며 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 이름은 좀 크게 써라.”
옥례가 핀잔을 줬다.
“당신이 사또여?”
“한 집안 가장인디 이 정도는 커야제.”
복순이 웃으며 두 이름을 똑같은 크기로 썼다.
그 뒤 종이에는 이름이 하나씩 늘었다. 봉칠, 금례, 춘매. 복순은 사람을 만나면 이름부터 물었다. 누구네 아버지나 누구네 댁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내 이름은 써서 뭐 혀?”
춘매가 묻자 복순이 말했다.
“나중에 누가 물으면 말해주려고.”
“뭘?”
“이 쌀을 누가 키웠는지.”
봉칠은 자기 이름 밑에 작은 벼 이삭을 그려달라고 했다.
“왜?”
“내 이름만 있으면 심심허잖여.”
금례가 핀잔을 줬다.
“평생 논에서 살았으면 됐지, 종이에서까지 벼 옆에 있고 싶어?”
“그럼 니 옆에는 뭘 그려?”
“나는 됐어. 이름만 똑바로 써줘.”
사람들은 처음에는 장난처럼 이름을 맡겼다. 그러나 복순이 종이를 펼쳐 보여주면 누구나 자기 이름 앞에서 잠시 조용해졌다.
평생 남의 장부에 소작인 몇 호로 적히던 사람들이었다. 자기 이름 석 자가 볏섬 숫자보다 먼저 놓인 종이를 보는 일은 낯설고도 뭉클했다.
복순은 그날의 일도 짧게 남겼다. 소작료로 몇 섬을 냈는지, 누구 집 쌀독이 먼저 비었는지, 수세를 못 내 논을 빼앗길까 울던 사람이 누구인지.
아직 문장은 서툴렀다. 모르는 글자는 동그라미로 남겨두었다가 최 서방에게 물었다.
어느 날 옥례가 말했다.
“복순아. 좋은 일도 써놔.”
“좋은 일이 있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써. 맨날 서러운 것만 보면 종이도 숨 막히겄다.”
그래서 복순은 보리밥 속 돌을 골라 금상이라며 웃은 날을 적었다. 아버지가 겨울 논으로 도망간 날도 적었다. 어머니가 된장을 짜게 담가 물을 두 사발이나 마신 일도 썼다.
옥례가 그 말을 듣고 복순의 등을 쫓아다니며 때렸다.
“그걸 왜 써!”
“좋은 일도 쓰라며!”
“그게 좋은 일이여?”
“웃었으니 좋은 일이지!”
두 사람의 웃음이 마당을 돌았다.
복순의 종이는 장부가 아니었다. 돈을 받을 사람의 기록도, 쌀을 거둘 농장의 기록도 아니었다. 쌀을 키우고도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작은 자리였다.
복순은 종이들을 삼베 끈으로 묶어 궤짝 밑에 숨겼다. 맨 앞장에는 서툰 글씨로 이렇게 적었다.
‘서수 사람들.’
그리고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썼다.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그날 밤 바람이 문풍지를 흔들었다. 복순은 자신이 적은 이름들을 한 사람씩 소리 내어 읽었다. 이름은 작았지만, 읽을 때마다 방 안에 사람이 하나씩 들어와 앉는 것 같았다.
― 다음 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