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홍 전 군장대학교 명예교수(전북문인협회 회원)
①아버님 어머님 추모비
철학자 청송 고형곤 박사는 일제강점기 1906년에 임피군 남일면 상갈리(현 군산시 임피면 월하리 상갈마을)에서 아버지 고병소(高炳韶)와 어머니 창녕 조씨의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상갈운 마을(월하리에서 으뜸가는 큰 마을)에서 800년째대를 이어온 중농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농사를 짓고 어머니는 준엄하면서도 유머가 있으셨던 분이었다.
청송 고형곤은 1928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 1930년 법문학부로 진학하여 1933년 경성제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38년에 연희전문학교에 부임, 철학을 가르쳤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내고 전북대학교 총장을 역임 후 제6대(1963-1967) 국회의원(민정당, 민중당, 신민당)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는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계은퇴를 했으며 2004년에 작고(향년 98세)했다.
청송 고형곤은 1973년 봄철 한식날에 상갈운 마을 영모재 우측에 모신 아버지 어머니 추모비를 건립하기 위해서 고향을 찾았다.
69세의 나이에 그는 즉흥적으로 국한문 혼용으로 자식의 애틋함을 담아 『아버님 어머님 추모비』를 완성했다.
“어머니는 중키에 약간 큰편이었고 동글 갸름한 얼굴 가느다란 눈매 맑은 아미가 인상깊고 단정한 그 성품 매사에 끊고 맺고 철저하셨다”라고 비문을 시작했다.
또 “내가 잔글씨를 쓰는 걸 보고는 왜 글자를 큼직큼직하게 쓰지 못하느냐고 언짢아했다.
해학을 즐기고 극적 표현이 풍부하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로 곧잘 좌중을 웃기는가 하면 준엄하기 짝이 없어 장자부가 나이 70에도 시집살이를 면치 못했다”고도 했다.
청송 고형곤은 어머니에 얽힌 숱한 일화 가운데 서울을 오고가며 있었던 기차 안에서의 이야기를 추모비에 소개했다.
“쌀밀수를 하는 여인이 쌀자루가 터져서 쩔쩔매는 걸 보고 늘 지니고 다니던 실바늘을 내주어 치사를 받기도 하고 옆 좌석 신사들이 연필이 없어 아쉬워하는 꼴을 보고 괴춤에 간수했던 연필을 꺼내주어 그들을 무색케 한 일도 있었다”고 어머니의 지혜와 인품을 위트있게 묘사하기도 했다.
“불의엔 굳세게 항거하고 얄미운 놈은 한번 꼭 쥐어박아야만 시원한 성품이었지만 가엾은 사람들에게 끝없이 인자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백릉 채만식 작품 속에 나오는 주인공의 해학을 떠오르게 했다.
청송 고형곤은 “가석하게도 때와 처지를 못 타고나서 사회적으로는 그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으나 우리 가문에 끼친 공적은 매우 크다.
가난한 살림을 먹고 살만큼 바로잡아 자손들의 출세의 터전을 닦았고 무엇보다 특기한 것은 그 좋은 혈통이 대대손손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 언젠가는 반드시 후대 자손들 중에 이분과 같은 훌륭한 인물이 태어날 것을 확신한다”고 고씨 가문에 시집와서 대한민국의 으뜸가는 명문가로 일으켜 세운 어머니 창녕 조씨의 공로를 기리는 자식의 애틋한 마음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청송 고형곤은 “아버지는 호리호리한 큰 키에 약간 긴 얼굴 검붉은 구레나룻까지가 흡사히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연상케 했다.
47세로 일생을 마칠 때까지 그는 한 농민으로서 생에 충실했다.
남과 같이 권세를 부려본 적이 없고 남에게 해라고는 바늘 끝만큼도 끼친 일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또한 아버지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새벽같이 일찍 일어나서 어슴어슴 땅거미 질 때까지 흙을 파고 곡식을 심고 가꾸고 주어진 숙명의 길을 뚜벅뚜벅 대지 위에 그림자를 뒤로 고독하게 걸어갔다”고 묘사했다.
철학자 청송 고형곤이 당장이라도 환생하여 영모재 앞 상갈운 호숫가를 거닐며 후학들에게 희망이 담긴 메시지를 설파할 것만 같다.
“여기에 진실이 있다. 우리는 이분의 일생 속에서 진실을 배워야 한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의 진실이다.
나도 그 언젠가는 이 계절 밑에 이른 봄철 할미꽃으로 피어 따스한 햇살을 즐기리”라고 비문을 끝맺으며 그는 인생의 진리와 순환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군산신문이 경향 각지의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새해에 독자여러분들의 가정에 만복이 깃드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