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홍 전 군장대학교 명예교수(전북문인협회 회원)
②소설가 백릉 채만식 문인비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1978년 청송 고형곤(채만식기념비추진위원회 위원장)은 이길연 군산시장, 이병훈 시인과 함께 백릉 채만식 28주기가 되는 6월 11일을 맞아 백릉 채만식 문인비 건립에 앞장섰다.
그로부터 6여 년이 지난 1984년 월명공원에 ‘백릉 채만식 문인비’가 건립되었다.
청송 고형곤은 임피군 남이면 상갈운리 출신이고 백릉 채만식은 임피군 군내면 동상리 출신이었다.
백릉 채만식은 청송 고형곤의 임피보통학교 4년 선배가 된다. 백릉 채만식의 오랜 친구였던 이무영에 따르면 백릉 채만식은 고집이 세고 직선적이어서 아무하고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고 했다.
학창시절 백릉 채만식과 교유했던 임피 동향인 청송 고형곤은 백릉 채만식에 대해 “성격이 조촐해서 필요 이상의 호의를 베풀지 않고 기발한 풍자를 잘하던 미남형 재주꾼”이라고 기억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백릉 채만식이 일본 유학중 중도 귀국후 단편 ‘세 길로’가 이광수에 의하여 ‘조선문단’에 발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1925년 7월 동아일보 입사해 그 다음해 10월 사직했다.
청송 고형곤 역시 문재가 있어 경성제국대학 2학년 재학중에『머슴 문성이』라는 단편소설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졸업 후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동아일보 재직 시 춘원 이광수 밑에서 편집부 일을 할 때 백릉 채만식과의 만남이 자주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어릴 때 총명했던 청송 고형곤은 5살부터 14살까지 서당에 나가 한학을 익혔다. 그때 만난 스승이 제당 신일균 선생으로 알려져 있다.
제당선생의 문하생이었던 청송 고형곤은 1999년 9월 9일 고령의 나이(93세)에도 불구하고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문하생들의 아들들과 함께 영창리 소령마을 입구에 ‘제당선생교육개혁정신선양비’를 건립했다.
청송 고형곤은 백여 년 전 교육기관이 변변치 못하던 시절, 제당선생이 먼 앞날을 내다보고 한학뿐 아니라 한글과 실용주의, 계몽운동 등을 가르친 스승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제당선생으로부터 물려받은 가르침을 잊지 못해 숙원이던 ‘제당선생교육개혁정신선양비’를 세우고 비문을 직접 써올린 것이다.
17·8세때 사숙했던 제당선생의 송덕비를 세운 일은 대의와 의리정신을 중시하는 청송 고형곤의 유교적 선비정신으로 보아야 옳다.
청송 고형곤은 14살의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 6년 학업과정을 1년 반 만에 마치고, 당시 관립 일류학교였던 이리농림학교에 입학을 했다.
이리농림학교에서도 5년 학업과정을 3년에 끝내고 당시 어렵다던 경성제국대학 예과시험에 합격하는 쾌거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대학 재학시절 문학에 발군의 소질을 보였던 그는 2학년때 『머슴 문성이』라는 단편소설을 ‘대중공론’에 발표(동아일보 1931. 1. 30.)하여 이효석, 염상섭의 작품과 함께 예상외의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정도가 못될 바에야 삼류 문사로 일생을 보내기 보다는 차라리 학문을 하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했다.
그후 청송 고형곤은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 공부에만 매진을 했으니 일찍이 철학도로서 현명한 판단을 한 것이다.
청송 고형곤 박사는 아흔아홉의 백수를 누리면서 끝까지 맑은 정신을 간직하다 돌아가신 점이 놀랍고, 고시에 합격한 아들 고건에게 ‘줄서지 마라’, ‘돈받지 마라’, ‘술자랑 마라’는 3계명을 지키도록 하여 두 번이나 총리를 역임하게 한 사실이 놀랍다.
우리 고장의 철학자 청송 고형곤 박사가 살아생전에 대한민국의 모범이 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명문가를 만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