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백릉 채만식(1902-1950)의 고향 군산은 장편소설 ‘탁류’의 고향이다.
그는 식민 지배의 위기가 고조되었던 1902년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 중농 집안의 5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무려 300여 점 이상의 작품을 창작하여 일명 ‘백릉문학’을 탄생시킨 그는 불행하게도 6.25 전쟁이 발발하기 2주 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불후의 명작 ‘탁류’를 통해 조선인들의 삶을 풍자적으로 표현했던 천부적인 문재(文才)의 작가임을 증명했다.
필자는 선배 문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전북 인물 오백년사-채만식 편’을 통해 그가 어떻게 사회적 현실과 인간의 모습을 풍자와 유머로 작품 세계를 드러냈는지 그 배경을 탐색할 수 있었다.
그는 “나는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했다. 나보다도 더 좋은 글이나 책을 발견할 때면 나는 그것들과 목숨을 바꾼다 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그만한 글을 쓴다는 것 또한 얼마나 보람찬 일이겠는가?”라고 작가의 간곡한 열망을 표했다.
고향에서는 백릉 채만식이 대문호로 성장했던 또 하나의 배경으로 ‘가족사’를 꼽고 있다.
그것은 유년 시절부터 청소년 시절에 이르기까지 소설가로서 성장하는데 맏형수 이선하의 역할이 컸다는 점이다.
1884년생인 그의 형수는 채만식보다 나이가 20살이나 많았던 자상한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따스하게 ‘막내 시동생’을 보살펴 주었고, 자신의 박식한 역사 지식을 그에게 들려 주었던 신여성이었다.
채만식이 말년에 폐환으로 투병하면서 역사소설 ‘옥랑사’(1948)를 쓰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었으며 그 내용도 형수한테서 들었던 이야기가 바탕이 되었다.
부잣집 막내 아들로 태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한 그는 4개년 과정의 임피보통학교를 졸업(1914년)한 후 4개년 과정의 중앙고보를 졸업(1922년 3월) 했다.
소년 채만식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문학적 정서를 간직하여 여름방학이 돌아오면 고향에 으레 내려왔다. 원두막으로 친구들을 불러 모아 하모니카와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노래를 즐겼다.
뿐만 아니라 항상 팔에 끼고 다니던 소설책을 펴 낭독을 해주었고 그럴 때마다 마을 친구들은 채만식의 소설 낭독술에 새삼 감동을 했다.
그 무렵 채만식은 원두막의 ‘도령 소설가’, ‘하모니카 학생’으로 불렸다.
어려서부터 소설가로 대성할 수 있는 선천적 재주를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금만평야를 바라보며 고향의 풍만한 정서와 낭만 속에서 성장하였다.
채만식은 서울에서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서울고보 재학중인 보통학교 1년 후배 진장권(독립유공자)과 함께 임피에 내려와 김석종, 최한풍, 김홍렬, 황봉규(군산예총회장 황대욱의 조부) 등과 함께 1919년 3월 29일 ‘임피장터 만세운동’을 계획을 하다 발각된 사실이 있었다.
그후 중앙고보를 졸업 후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고등학원 문과에 입학(1922년 4월)을 했다.
그러나 그는 1923년 여름방학에 귀국 후 일본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해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고 대지진을 기화로 일본인들의 조선인들에 대한 대량학살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잔인무도한 만행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채만식은 1923년 대학 2학년을 중퇴하여 다음해 1월 장기결석, 학비미납으로 최종 제적하기에 이르렀다.
생전에 그는 친구들에게 “동경의 지진을 겪지 않았다면 내가 세상을 얼마나 모르고 살았을지 모른다”고 푸념을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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