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홍 전 군장대학교 명예교수(전북문인협회 회원)
독립투사 김영현 선생은 1907년 3월 29일 서수면 서수리 618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김용석 공의 6남 3녀 중 2남이시다.
유년시절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으며 임피보통학교와 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당대 수재들이 운집하던 수원고등농림학교에 당당히 합격을 했다.
서수 보천사 입구에 있는 선영의 선생 묘비에는 ‘자기 한몸 영달의 길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유독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의협심이 강한지라 여기에 안주하지 아니하고 자주독립 정신을 고취하고 계몽하는 일에 몰두했다’고 새겨져 있다.
선생은 수원고농 재학중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차에 반일사상이 농후하다는 이유로 1928년 9월 3학년 재학중 퇴학을 당했다.
‘조선일보(1928년 10월 4일자)는 ‘수원고등농림학교 비밀결사사건’으로 임과(林科) 김영현 등 5명을 퇴학 처분했다’고 보도했다.
퇴학 처분의 배경은 ‘옥구소작쟁의 사건’ 일명 ‘옥구농민항일항쟁’으로 비화한 서수 청년회 및 농민조합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선생은 수원고농 2학년 재학 시 1927년 8월 3일 서수청년회 창립 의장(21세)에 취임했다.
그때 서기로 취임한 장태성은 선생의 전주고보 2년 후배였다. 청년회 활동은 창립 3개월 후 서수에서 발생한 ‘옥구농민항일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11월 ‘옥구농민항일항쟁’이 일어나기 20여 일 전까지 농민조합 서수지부 임시 총회 개최(1927년 11월 9일)는 계속되었다.
‘옥구농민항일항쟁’은 선생을 중심으로 후배 장태성, 형 김영준 등의 농민지도자들과 농민들이 치밀하게 뭉쳐 일으킨 독립운동이었다.
선생은 1928년 9월 퇴학처분 후 1928년 12월 만주로 망명하여 돈화현에 있는 항일독립군에 투신해 군자금 조달과 무기 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4년 후 1932년 7월에 독립군 동지들과 합세하여 간도 일본영사관을 습격했다.
일경과 교전하다 다리에 심한 총상을 입고 원통하게도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일경은 1933년 12월 청진지방법원 예심에서 선생에게 ‘치안유지법위반’이라는 명목으로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었고 대전, 마포, 서대문, 함흥 등지의 형무소를 전전하며 복역했다.
선생이 체포되어 공판에 회부될 때 주소는 ‘중국 연길현 용정촌 제1구 우장리’로 기록되어 있었다.
선생은 조국광복을 불과 1년을 남겨둔 채 투옥생활 12년 3개월 만인 1944년 3월 12일 함흥형무소에서 옥중 고혼이 되었다.
선생의 재적등록부에 따르면 순국 시각은 3월 12일 오후 7시, 사망주소는 함흥부 일출정 35번지(형무소 주소)로 되어 있었다.
광복 후 1946년 선생에게 수원고등농림학교 명예졸업장을 수여했고 1986년 12월 독립유공자로 확인되어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조국 광복을 위해 젊음을 불태우다 26세에 체포되어 38세의 젊은 나이에 고혼이 되신 우리 고장의 자랑스런 순국선열이다.
711번 지방도로변 서수 보천사 입구에는 묘소 진입을 알리는 안내표지판 하나 없어 쓸쓸하기만 하다.
‘독립투사 김영현 선생 묘 입구’를 표시하는 이정표를 건립해 국민 모두가 선생의 애국적 단심을 선양하고 마음 속에 새기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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