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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군산 구암동 헛간에서 피어난 성화(聖画), 운보와 우향을 기억하자

최규홍 전 군장대학교 명예교수(임피향토사연구회 대표)

군산신문2026-04-13 11:04:16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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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홍 전 군장대학교 명예교수(임피향토사연구회 대표)
 

역사는 화려한 궁궐보다 소박한 토방에서 더 깊은 뿌리를 내리기도 한다.

 

우리 군산 구암동의 한 귀퉁이, 지금은 비록 개발의 물결에 밀려 빈터로 남아있으나 70여 년 전 그곳은 한국 미술사의 거목 운보 김기창과 그의 반려자 우향 박래현이 민족의 비극을 예술로 승화시킨 ‘성소’였다.

 

우향 박래현에게 군산은 제2의 고향이다. 평남 진남포에서 태어난 그녀는 여섯 살 때 지주였던 부친을 따라 넓은 평야가 있는 군산 구암동으로 이주했다.

 

군산에서 초등학교를 나오고 전주에서 여학교를 마친 우향은 일본 유학을 거쳐 당대 최고의 여류 화가로 성장했다.

 

청각장애를 딛고 일어선 운보와의 소박한 결혼식, 그리고 닥쳐온 6·25 전쟁이 발발해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천재 화가들은 공산치하에서 3개월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운보는 장애인으므로 납북을 모면했으나 피난을 가지 못했던 여동생 기옥과 남동생 기만은 납북되고 말았다.

 

9.28 수복 후 군산으로 피난온 운보는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동네 사람 김종대라는 화가의 도움으로 미군 초상화를 그리며 연명했다.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피난민의 고단한 삶이었지만, 운보는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린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남는 돈을 꼬깃꼬깃 모아 토방을 벗어나 처갓집 근처에 반듯한 집 한 채를 장만(1952년 10월 1일 구암동 390번지 대지 251㎡)했다.

 

운보‧우향은 화실이 갖춰진 이 집을 ‘구암장’이라고 불렀다.

 

성화 ‘예수의 생애’(29점)는 구암장에서 운보가 1952년 1여 년에 걸쳐 전력을 다해 제작한 작품들이다.

 

1953년 독일 선교사의 제의로 ‘부활’을 추가로 제작하여 ‘예수의 생애’ 총 30점을 완성했다.

 

운보는 전쟁의 암운 속에서 예수의 고난이 우리 민족의 비극과 닮아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예수의 성체가 꿈에도 보이고 백주에도 보였다”고 회상할 만큼 성화 제작에 몰입했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한국적 예수의 형상은 서구의 종교화를 넘어 우리 민족의 한과 희망을 담아낸 위대한 선언이었다.

 

수복 후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구암동 시절 그린 운보의 성화와 우향이 그린 입체파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제5회 운보-우향 부부전’을 개최했다.

 

그때 전시된 작품의 시작과 끝의 대부분은 구암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운보-우향 부부가 살았던 구암동 390번지는 현재 공터로 남아있지만 이곳은 단순한 공터가 아니다.

 

전쟁의 고통 속에서도 예술의 혼을 불태웠던 운보의 집념과, 남편의 장애를 사랑으로 보듬으며 군산의 품으로 이끌었던 우향의 정취가 서린 곳이다.

 

이제 우리는 이 ‘스토리텔링이 있는 성지’를 다시 보아야 한다.

 

운보가 성화를 그렸던 소박한 헛간 작업실을 고증대로 복원하고, 구암동의 예술혼을 잇는 ‘역사·문화 벨트’를 구축해야 한다.

 

70여 년 전, 보스턴의 기적을 일군 송길윤의 다리가 군산을 달렸다면, 운보의 붓끝은 구암동에서 민족의 아픔을 위로하는 성화를 그려냈다.

 

이 살아있는 서사들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일이야말로 새만금 시대를 맞이하는 군산의 진정한 품격을 세우는 길이다.

 

구암동 390번지의 잡초를 걷어내고, 그곳에 군산의 자부심을 다시 심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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