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홍 전 군장대학교 명예교수, 향토사학자
역사는 거울과 같아야 한다. 거울 앞에 섰을 때 내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치듯, 역사의 기록 또한 즐거움이나 흥미를 위해 왜곡되지 않고 사실 그대로 기술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대중 매체의 영향력 아래 실존했던 항일 독립운동가의 삶이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되는 서글픈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돈헌 임병찬(1851~1916) 의병장. 그는 군산 옥구읍 상평리 광월마을 남산 밑에서 태어났다.
흔히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들 하지만, 돈헌의 가문은 달랐다.
이복동생 병대, 아들 응철, 손자 진과 수명에 이르기까지 3대가 항일 구국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다.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을 보여준 가문이었다.
그는 16세에 전주부 식년감시에 장원급제한 수재였으나, 빈한한 가세를 돕기 위해 향리의 길을 택했다.
당시 전라도 향리의 위세는 대단했다. 대원군이 조선의 3대 폐단 중 하나로 꼽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명석한 두뇌로 막대한 재산을 모았던 그는, 그러나 그 재산을 자신의 안위가 아닌 빈민 구제와 독립운동 자금으로 기꺼이 내놓았다.
이로 인해 후손들이 만주 땅을 떠돌며 고초를 겪어야 했던 사실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운명의 1882년(임오년), 시국이 불안해지자 서른둘의 청년 임병찬은 친족들을 이끌고 옥구에서 정읍 산내면으로 이사한다.
이후 낙안군수로서 선정을 베풀고 다시 산내면 종송리로 돌아와 유림을 가르치던 중 동학혁명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만나 여기서 세간의 논란에 휘말린다.
임병찬이 패배 후 종송리로 피신해온 동학의 거두 김개남의 체포에 협조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임병찬은 성리학적 근왕의식이 투철한 복벽주의 퇴임 관리였으므로 당연히 김개남 장군을 왕조 질서를 흔드는 비도로 인식했을 것이다.
외세로부터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 했던 두 리더의 신념이 극명하게 대립한 것이다. 이는 이념적 잣대로 누가 옳고 그름을 가릴 문제가 아니었다. 시대적 상황과 가치관의 충돌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의 간극을 메우기는커녕, 자극적인 픽션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매체의 태도에 있었다.
몇 년 전 방영된 드라마 ‘녹두꽃’이 대표적이었다. 드라마에서 임병찬이 김개남과 식사를 하던 중 관군에게 밀고하고 비열하게 도망치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친구 팔아 군수 자리 얻었느냐”는 모욕적인 대사를 얹은 것이다. 이는 역사 왜곡이자 고인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이었다.
임병찬이 낙안군수를 지낸 것이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5년 전 1889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1894년 체포된 김개남을 팔아 군수가 되었다는 드라마 설정은 시기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작가의 ‘픽션’일 뿐이었다.
실존하는 독립운동가를 졸열한 인간으로 둔갑시킨 붓끝 아래, 돈헌회 후손들이 분통을 터뜨린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창작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하나 항일 투사의 고결한 생애가 난도질 당하는 창작활동은 지양되어야겠다.
우리는 잘못된 역사인식의 간극을 좁히고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
군산 임씨재각에 서린 돈헌정신과 정읍 무성서원에서 피어오른 항일의 불꽃이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역사의 거울을 닦는 일,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줄 가장 고귀한 유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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