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홍 전 군장대학교 명예교수
춘고(春皐) 이인식(李仁植, 1901.10.22 ~ 1963.03.21) 선생은 400여 년 동안 12대를 이어온 임피의 만석부호 이태하 가문의 3남 2녀 중 막내로 임피면 읍내리 453번지에서 태어났다.
임피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6세에 조득(17세) 여사와 결혼했고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보성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주최 측과 미국 영사관 사이 연락 책임을 맡는 한편 전북 학생 대표로 활발히 활약했다.
그러다 3월 5일, 종로구 송현동 62번지 자택에서 다른 동지 43명과 함께 일경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군자금 모집의 비밀 사명을 띤 이원형(볼기 80대를 맞고 석방된 인물)을 알게 됐다.
출옥 후 독립군자금을 마련하기로 결심한 선생은 고향 임피로 내려와 상속받은 땅을 팔거나 저당을 잡아 8,000원이라는 거금을 마련했다.
평생을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만석꾼 가문의 막내도령이 조성한 그 유산은 상해 임시정부의 숨통을 터줬고 식민지 민중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선생은 다시 상경해 이원형을 만나 “신의주로 가서 엿판에 ‘올림픽 마크’ 새긴 엿장수를 찾으라”는 비밀 지시를 받았다.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친척 한 사람과 서울에서 개성까지 기차를 탄 선생은 개성에서부터 신의주까지 한 달을 피땀 흘려 걸어갔다. 때는 1920년 8월경이었다.
신의주에 도착해 만나는 엿장수마다 엿을 사 먹으며 사흘을 헤맨 끝에 마침내 올림픽 마크가 새겨진 엿장수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안내로 밀선을 타고 만주 봉황성으로 건너간 선생은 1919년 4월 발족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에게 8,000원을 바치고 무기명 1,000원권 공채 5매와 기명 공채 3매를 수령했다.
당시 선생이 받은 공채 발행인은 대한민국임시가정부 재무국 총재 이승만, 재무총장 허영완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됐으나 선생은 곧바로 귀국하지 못했다. 남아있는 동포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 목단강고려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부임해 헌신하다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기 때문이다.
선생은 1946년 9월에서야 겨우 병석에서 일어나 장남 병주의 등에 업힌 채 38선을 넘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후 선생은 권력 쟁취로 혼란스럽던 정치판에 부화뇌동하지 않았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의 관직 제안도 단칼에 거절했다.
다만 전라북도지사의 간곡한 권유로 1953년, 폐교 위기에 처한 시골의 임피중학교 제2대 교장으로 부임해 인재 양성에 전념했다.
당시는 가난한 농촌 아이들이 농사일을 도우느라 중학교 진학은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선생은 자전거를 타고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배워야 사람 노릇을 한다”고 부모들을 설득했고 박봉을 털어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를 대줬다.
특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근학대(勤學隊)’를 조직해 약초를 재배하고 산약초를 캐 판 돈으로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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