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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비워야 삶의 빛이 보인다

군산신문2026-09-21 10:20:48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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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식 문학박사·문학평론가·시인

 

현대인은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해 살아간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오르고, 더 큰 성취를 이루려 한다. 우리는 채움이 곧 풍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많이 가질수록 마음은 복잡해지고, 바쁘게 살수록 삶의 여백은 사라진다. 풍요를 위해 채운 것들이 어느 순간 우리를 오히려 가두기도 한다.

 

그래서 삶에는 때때로 더하기보다 빼기가 필요하다. 비움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정말 소중한지를 가려내는 일이다.

 

기독교에는 케노시스(Kenosis)’, 비움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낮추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왔다고 기록한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자신의 것을 내어주었으며, 끝내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삶이다. 여기서 비움은 패배나 포기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모습이다.

 

비움의 의미는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우리의 일상에서도 발견된다. 그림은 여백이 있어야 살아나고, 음악은 소리와 소리 사이의 침묵을 통해 깊어진다.

 

속이 빈 대나무가 바람을 만나 소리를 내듯, 빈 공간은 결핍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가능성이다.

 

우리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욕심과 걱정, 집착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새로운 생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와 누군가에 대한 미움,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마음을 차지하면 정작 지금 곁에 있는 사람과 아름다운 순간을 놓치기 쉽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애쓰다가 얻은 것 때문에 자유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더 많이 소유할수록 지켜야 할 것도 많아지고, 더 높은 곳에 오를수록 내려다볼 수밖에 없는 것도 많아진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채웠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채웠느냐일 것이다.

 

장자(莊子)허실생백(虛室生白)’은 비움의 지혜를 잘 보여준다. 방을 비우면 밝음이 생긴다는 뜻이다. 마음도 그렇다. 비워야 보이고, 비워야 들린다.

 

오늘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너무 많은 소리를 듣는다.

 

스마트폰의 알림과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잠시도 마음을 쉬게 하지 못한다. 그럴수록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잠시 멈추는 시간인지 모른다.

 

창밖의 계절을 바라보고,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오래된 친구에게 안부를 묻고, 가족과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는 일은 생산성으로 계산할 수 없지만 삶을 다시 살아 있게 한다.

 

비움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소중한 것을 남기는 선택이다

 

쓰지 않는 물건을 내려놓고, 지나친 욕심을 줄이고, 오래된 미움을 내려놓는 것. 때로는 내 생각만 옳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 역시 비움이다.

 

신앙의 자리에서 비움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가 말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더 큰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을 조금 낮출 때 비로소 타인의 아픔이 보이고, 마음을 비울 때 사랑이 들어설 자리가 생긴다.

 

우리는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보다 어떻게 살았느냐일 것이다.

 

무엇을 움켜쥐었는가보다 무엇을 나누었는가,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가보다 누구의 손을 잡아주었는가가 더 오래 기억될 것이다.

 

비움은 빈자리가 아니다. 삶의 본질을 다시 채우기 위한 여백이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쯤 내려놓아 보자. 욕심 하나, 미움 하나, 지나친 자존심 하나를 덜어내는 것이다.

 

그러면 비워진 자리에서 새로운 것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곁에 있는 사람이 보이고, 계절의 변화가 보이고, 무엇보다 너무 바빠서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자신의 삶이 보인다.

 

비워야 비로소 보인다. 비워야 비로소 들린다. 비워야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비워진 마음에는 사랑이 머물 자리가 생긴다.

 

어쩌면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할 삶의 지혜는 더 많이 채우는 데 있지 않다. 때로는 하나씩 내려놓으며 삶의 본래 빛을 되찾는 데 있다.

 

삶이 무거워질수록 더 움켜쥐기보다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돌아볼 때다. 비워야 삶의 빛이 보인다.

 

<본 칼럼은 본사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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