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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미(米)’-서수 들판에 묻힌 백 년의 약속

군산신문2026-08-31 14:29:59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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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쌀’을 빼놓을 수 없다. 옥구와 서수의 들판에서 자란 쌀은 군산항과 철도를 따라 세상으로 나갔고 그 길에는 농민들의 삶과 식민지 시대의 아픔, 이를 이겨내려 했던 저항의 역사가 함께 놓여 있다. ‘천년의 미(米)’는 한 톨의 쌀을 매개로 군산과 서수의 시간을 따라가는 역사소설이다. 1900년대 초 서수 들판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산업화를 지나 오늘의 군산으로 이어진다.  


군산신문은 지역의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 또한 지역신문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해 이 작품을 특별기획 연재소설로 선보인다.  


작품에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내용과 소설적 상상력이 함께 담겨 있다. 인물과 사건, 대화 등은 작품의 구성에 따라 재창작됐으며, 역사적 사실은 관련 사료와 자료를 바탕으로 확인했다. 한 톨의 쌀에 담긴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 이제 그 오래된 이야기를 군산신문에서 시작한다.<편집자주>

 

최연호 ()서수면사람들 이사장


필자는 최연호 전 KOTRA 수출전문위원, 현 (사)서수면사람들 이사장. 지역의 역사와 쌀 문화를 바탕으로 역사소설 ‘천년의 미(米)’를 집필했다.

   

    

ㅣ제1회 쌀도 고향이 있는 법이여ㅣ

     

2026년 늦가을서수 들판은 온통 황금빛이었다.

    

벼를 베어낸 논과 아직 추수를 기다리는 논이 들판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남아 있는 벼들이 몸을 낮추었다가 다시 일어섰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황금빛 물결이 천천히 들판을 건너가는 것 같았다.

    

해원은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에게 이렇게 넓은 논은 낯설었다.

    

할아버지.”

    

?”

    

저게 다 쌀이에요?”

    

할아버지가 웃었다.

    

벼여.”

    

?”

    

논에 있을 때는 벼고, 껍질을 벗겨야 쌀이 되는 거여.”

    

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손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들판으로 눈을 돌렸다.

    

먹는 건 쉬워도 키우는 건 복잡혀.”

    

그 말에는 이상하게 긴 시간이 들어 있었다.

    

해원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볏짚 냄새와 흙냄새가 마당까지 밀려왔다.

    

할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들판을 바라보았다. 해원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렇게 둘이 나란히 앉아 있자 오래된 집의 마루와 마당, 그리고 그 너머의 들판이 마치 한 장의 오래된 사진처럼 고요해졌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원아.”

    

?”

    

이리 와 봐라.”

    

할아버지는 마루 한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오래된 마루판 하나를 손으로 더듬었다.

    

해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거기 뭐가 있어요?”

    

할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루판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천천히 들어 올렸다.

    

끼익.

    

낡은 나무가 긴 잠에서 깨어나는 듯한 소리를 냈다.

    

마루 아래는 어두웠다. 할아버지가 몸을 숙여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뒤 먼지가 잔뜩 묻은 철제 상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자는 오래되어 붉게 녹슬어 있었다.

    

이게 뭐예요?”

    

할아버지가 상자 위에 쌓인 먼지를 손으로 털었다.

    

아주 오래된 거여.”

    

얼마나요?”

    

나보다도 오래됐지.”

    

해원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올라왔다.

    

안에는 누렇게 변한 종이들과 작은 사진 몇 장, 빛이 바랜 기록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귀퉁이에 작은 천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매듭을 천천히 풀었다. 해원이 몸을 가까이했다.

    

주머니 안에는 검게 변한 볍씨 몇 알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뭐예요?”

    

볍씨다.”

    

해원이 웃었다.

    

이렇게 까만 게요?”

    

세월을 먹어서 그런 거여.”

    

할아버지는 볍씨 한 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해원에게는 그저 작고 마른 씨앗일 뿐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눈빛은 달랐다. 그는 볍씨를 오래 바라보았다. 마치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쌀도 고향이 있는 법이여.”

    

해원이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쌀에도 고향이 있어요?”

    

있지.”

    

어디요?”

    

할아버지가 마당 너머를 가리켰다.

    

저 들판.”

    

해원은 다시 서수 들판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과 똑같은 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이 볍씨도 저기서 나온 거예요?”

    

할아버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상자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색은 누렇게 변했고 모서리는 닳아 있었다. 종이에는 삐뚤삐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해원이 읽어보려 했지만 글씨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누가 쓴 거예요?”

    

할아버지가 말했다.

    

복순이라는 사람이 썼다.”

    

복순?”

    

해원에게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우리 가족이에요?”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했다.

    

가족이기도 하고…… 이 들판의 사람이기도 하지.”

    

해원은 더욱 궁금해졌다.

    

무슨 뜻이에요?”

    

할아버지는 대답 대신 종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사람들의 숨결이라도 남아 있는 듯했다.

    

1900년대 초.

    

이 들판의 쌀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군산항에는 쌀가마가 산처럼 쌓였고, 들판에는 농민들이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땅의 주인은 바뀌어 갔고 농민들은 자신이 지은 쌀을 마음대로 먹을 수도 없는 세상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아이들은 태어났고 사람들은 사랑했고 농부들은 씨를 뿌렸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묻기 시작했다.

    

이 땅의 쌀은 누구의 것인가.

    

할아버지가 철제 상자에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해원이 사진을 받아 들었다.

    

이 사람이 복순이에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럼 누구예요?”

    

옥례.”

    

처음 듣는 이름이 또 나왔다. 해원은 사진 속 여자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빛이 바랜 사진 속에서도 여자의 눈빛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다.

    

옥례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천천히 말했다.

    

모든 이야기는 그 사람에게서 시작된다고 해야겠지.”

    

그 순간 바람 한 줄기가 마당을 지나갔다. 마른 볏짚이 서로 부딪히며 사각거렸다.

    

할아버지는 다시 손바닥 위의 검은 볍씨 한 알을 바라보았다.

    

작디작은 볍씨 하나.

    

그러나 그 씨앗에는 한 가족의 기억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살아온 세월, 나라를 빼앗긴 시대, 쌀을 빼앗긴 농민들의 눈물, 바다를 건너간 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견디고 다시 씨앗을 뿌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시간은 백 년을 거슬러 올라갔다.

    

1905년 봄.

    

옥례는 새벽부터 논으로 향하고 있었다. 스물여덟 살이었다. 남편 기석은 이미 앞서 논으로 나가 있었다.

    

봄 안개가 들판을 낮게 덮고 있었다.

    

옥례는 논둑에 멈춰 서서 흙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맨손으로 흙 한 줌을 집었다. 손가락 사이로 축축한 흙이 흘러내렸다.

    

농부에게 땅은 재산이기 전에 삶이었다. 아버지가 밟았고 할아버지가 밟았던 땅. 아이들이 태어나고 사람이 죽어 다시 돌아가던 땅이었다.

    

그때였다.

    

멀리 논둑 끝에서 낯선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옥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앞장선 남자의 옷차림이 마을 사람들과 달랐다. 그 뒤에는 통역을 맡은 듯한 조선인 한 사람이 따라오고 있었다.

    

옥례는 손에 묻은 흙을 털지 않았다. 그저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날 옥례는 알지 못했다. 논둑을 걸어오던 저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이 들판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후손이 백 년도 더 지난 뒤, 녹슨 철제 상자 속에서 검게 변한 볍씨 한 알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을.

    

천년을 이어온 쌀의 이야기는 그렇게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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